(2017년 12월 1일 구역예배공과)
당신의 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왕상 17:1, 17~24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로써,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시절 주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첫 등장부터 충격적인 말씀을 선포합니다. 1절을 보시면 아합왕을 거론하며 ‘가뭄을 선포’합니다. 그런 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겨주시고, 까마귀를 통해 빵과 고기를 먹고 살게 해주십니다. 몇 날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에 아들 한명과 살고 있는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은 아이를 살려내자 여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4절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이 고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1. 말씀은 메마른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단비’와 같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가뭄저주’의 원인이 아합왕에게 있음을 언급합니다. 왜일까요?
오므리왕조의 아합왕시대는 북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풍요로웠던 시대입니다. 병거2000대와 보병1만명을 앗시리아와의 전쟁에 보낼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으며, 솔로몬시대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고, 두로, 시돈과의 동맹을 통한 해상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으며, 사마리아에 상아궁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비인간적이며 폭력적인 양육강식의 시대였습니다.
아합왕이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이스라엘에는 바알종교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바알 종교’는 너무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며, 심지어 인신제사까지도 행하기도 했습니다. 왕상16:34절을 보시면 벧엘 출신 건축가 ‘히엘’에게 ‘여리고’에 성벽과 성문을 건축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의 첫째아들과 막내아들이 죽었습니다. 인신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여리고’에 성벽과 성문을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수6:26)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또한 왕상21장을 보시면, 아합왕이 욕심내던 나봇의 포도원을 아내 이세벨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강제로 빼앗은 사건이 등장합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으로 사사로이 매매할 수 없다(레25:23)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으며, 권력을 통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아합왕시대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시대는 어떨까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양육강식의 시대입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총기난동사건으로 60여명이 사망, 부산(천안) 여중생 폭행사건, 운전기사 혹은 아파트 경비원 욕설 및 폭행, 프랜차이즈점 기업의 대리점에 대한 횡포 등이 넘쳐납니다. 인신제사는 없을까요? 2006-2010년 통계에 잡힌 살해된 영아의 숫자는 59명입니다. 낙태숫자는 매년 150만명 이상입니다. ‘베이비박스’라고 들어보셨나요? ‘주사랑공동체’에 설치되어 있는 버려진 아이를 담는 박스입니다. 이곳에 버려지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장애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아합왕시대나 오늘날이나 별반다르지 않습니다.
가뭄은 이미 진행 중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가뭄저주’를 선포한 뒤에 가뭄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메마르고 사람들의 영혼이 메말라 죽어가던 시대에 이미 영적 가뭄은 심각한 수준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죽어가고 있는 백성들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아합왕과 귀족들과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가뭄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엘리야의 입술이 필요한 때입니다.
2. 말씀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하는 자에게 말씀은 역사합니다.
가뭄에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본문에 등장하는 고아, 과부, 병든자, 노약자, 가난한 자들일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왕상19:4절을 보시면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부터 매일 이렇게 고뇌(苦惱)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선포한 말씀 때문에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불면의 밤을 지새야만 했을 것입니다. 아합왕은 어떨까요? 왕상18:5절을 보시면 아합왕의 걱정은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2000의 병거들을 이뜰어야할 말들이 죽거나 병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무거운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까? 왜? 저에게 세상의 불의함을 보게 하셨습니까? 고뇌하던 엘리야 앞에서 여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 아들은 당시의 연약하고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본문 20절에서 엘리야는 아이의 시체를 앞에 두고 이렇게 절규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이런 아이들이 죽어갑니다. 이런 연약한 자들이 죽어갑니다. 왜? 저로 하여금 이런 죽음을 계속해서 보게 하시나이까?” 그리고서는 엘리야는 아이의 시체에 자신의 몸을 세 번 부딪히며 부르짖으며 간구합니다. 메마르고 죽어가는 이 아이를, 이 백성들을, 이스라엘을 살려달라고 자신의 온 몸을 내 던지며 기도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고뇌하며 자신의 온 몸을 던진 선지자의 기도를 듣고 그 아이를 살려주십니다.
메마르고 죽어가는 인생들을 향해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생명을 가져다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달려 죽으심으로 메말라 죽어가는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오늘 이 메마른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백석대학교회와 모든 성도님들의 입술에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이 담겨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서로 나누어 보자.
1.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불의함으로 인해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2. 메마른 세상(혹은 개인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살게 된 경험들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